이어서 수린은 다 드셨으면 가져갈게요,라며 빈 잔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안에서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수린이 설거지를 하는 칠팔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윤정은 자리를 피한 사람을 굳이 좇아 의미를 묻지 않았다. 찔러 본 입장에서는 무반응에 호불호가 공존했지만 시간은 많으니 수린은 넘어가기로 했다....
의사선생님의 손과 함께 눈을 덮고 있던 붕대가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간다. 윤정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던 동안 줄곧 안대를 끼고 있는 듯했다. 평소 안대를 끼고 자는 버릇이 있던 그녀는 잠자기 전이면 새카만 어둠 속에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르는 그 상태가 실명과 비슷하진 않을까 생각했었다. 손이 몇 바퀴나 돌았을까, 붕대가 다 풀리고 나자 눈꺼풀을 몇 ...
침대 맡에 기대어 두었던 기타를 손에 쥐었다. 별다른 할 일 없이 방에 있을 때면 무심결에 기타가 눈에 들어온다. 평소와 같이 악보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를 치겠다고 생각할 때면 어떻게 코드를 진행해야 할지, 어느 타이밍에 연주 스타일에 변화를 줘야 할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듣는 입장...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소녀가 조금 자라자 눈에 비치는 전부가 이상해 보였다. 책에서 본, 고층 건물들이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이밀집한 도시의 모습과는 다르게 구름을 걸친 산 중허리에 위치한 소박한 마을도, 마을 바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흉포한 늑대의 존재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공물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어른들도. 소녀는 어릴 적부터 충분하다는 ...
도시의 빛은 너무나도 밝아, 그림자가 어디까지고 뻗어있다. 도시를 선망해 눈이 멀어버린 자들은 뒷골목에나 숨어 자신의 손을 더럽혀 나간다. 언젠가 도시에 들어갈 날을 꿈꾸며 닫힌 문을 피가 나도록 두들겨보지만, 하루하루 버티기도 벅찬 뒷골목 삶에 볕이 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용이 나니, 대다수가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은 경우다....
주에 한 번, 직원 전원은 대강당에 모여서 '소중한 생명 ~단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이라는 교육에 참석해야 한다. 사내 사망률 그래프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지자 우리를 불쌍해 마지않는 세피라 호드가 열렬히 주장한 끝에 반영되었다. 일각의 소문에 의하면 호드의 전생의 끝은 자살이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확인할 길 없는 소문일 뿐이다. 교육 내용은 P...
달조차 가려진 밤. 가로등 하나 없는 뒷골목에는 곳곳마다 짐승떼가 날뛴다. 자신보다 위의 존재의 몰락을 노리고 숨어든 낙오자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쓰레기장을 뒤지는 해결사, 거기에 얼굴 없는 높으신 분들의 수족까지 합쳐지면 이제야 평소모습답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뒷골목 인생 중에서, 붉은 머리카락에 여자라는 성별의 해결사 칼리는 이형을 넘어서 기...
쓰다. 지금 당장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웃음이 가득한 너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서도. 달디 단 재료들이 잔뜩 들어간, 말하자면 달콤함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초콜릿 쿠키가 씹기 힘들 정도로 쓰다고 해봐야 너는 이해하지 못한 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상하다는 말만 되풀이할게 분명하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너니까 당연한 반응일테지만, 동생, ...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개적인 장소와 폄하하기 위한목적이 덧붙여진다면 더더욱. 각자의 지난 주 실적이 그래프화 되어 일목요연하게 낱낱이 공개되는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게시판 앞에 모여 있는 직원 한 뭉텅이에 가세했다. 지난 경험들을 바탕으로 밑에서부터 올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몇 칸 못 올라가서 내 이름이 보였다....
언젠가 환상체 작업을 준비 중이던 사무직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직원들은 인지필터를 사용하지 않는가?"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쌀쌀맞았다. "우리는 인지필터 상으로도 상상보다 훨씬 끔찍한 형상을 본답니다." 모니터 너머의 당신과는 달리 말이죠,라며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서랍을 열어 탄환을 세고 있자면 이제는 없는 그 직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과연...
"나, 사실 예전부터 계속 란 좋아해왔는데." 그렇게 말하고선 반응을 살펴보고 있자니, 잠시 뒤 나와 눈이 마주친 너는 말했다. "뭐라고 했어?" 너의 왼 손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귀를 막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이 들려있었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는 끝나는 듯 했다. 란도 자신이 못들었을 뿐인 이야기로 지나갈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
"…무슨 일있어?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라무네를 볼에 가져다 대며 묻자 너는 아무것도 아냐, 라면서 어물쩍 웃어 넘긴다. 그러고선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데 괜찮지 않다는 것 쯤은 나도 안다. 게다가 눈이 안웃고 있는걸. "말해보지 그래?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 "……" 다시 한 번 물어보지만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카스미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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